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종 무열왕/생애 (문단 편집) == 임금 시절 == [[비담의 난]] 진압 후 신라 정계의 최대 실력자로 떠오른 김춘추는 [[진덕여왕]] 치세에서 [[왕권]]을 강화하는 제도의 정비도 단행하였다. 이 때 신라의 중앙 관서 조직은 크게 확충되었는데 651년에는 재정 지출을 담당하는 창부, 입법과 형벌을 관장하는 좌리방부를 창설하였으며 [[국가]] 기무를 총괄하는 최고 집행 기구로서 집사부가 개설되었다. 위에서 언급된 당의 복식 도입을 주도하고 집사부의 설치를 건의한 사람도 역시 김춘추였다. 654년 진덕여왕이 승하하면서 비로소 [[성골]] 혈통이 완전히 끊기자 어쩔 수 없이 [[진골]] 중에서 왕을 추대해야 하는 순간이 왔고 [[화백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김춘추 대신 당시 [[상대등]]이었던 [[알천]]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의견도 약간 있었지만 자신감이 없었던 알천이 [[건강]]이 좋지 않음 등을 이유로 스스로 양보하는 식으로 물러나[* 이건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 알천의 건강이 좋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 알천은 636년 옥문곡 전투 당시 이미 지휘관이었으므로 654년에는 적어도 중년인데, [[상대등]]을 역임할 정도의 귀족이면 이미 고령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의 생몰년은 불명이지만 신라에서 보통 상대등직이 죽을 때까지 역임하는 종신직이었음을 감안하면 바로 다음 해 655년에 이찬 [[금강(동음이의어)#s-2.16|금강]]이 상대등이 되기 때문에,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1년 안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춘추가 순조롭게 첫 번째 진골 왕에 올랐다. 할아버지 진지왕이 폐위당한 지 76년만의 일이었다. 김춘추의 능력이나 세력도 세력이지만 혈통을 따져 봤을 때도 진골 중에서는 성골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진평왕의 아버지 동륜태자의 집안만을 성골로 삼았다는 설을 채용해도 그의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이었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그도 성골 집안에 속한다.] 별 문제없이 즉위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김부식]]의 분류에 따르면 신라 중대의 시작이며 [[일연]]의 분류에 따르면 신라 하고(下古)의 시작이었다'''. 어느 쪽에 있어서도 신라 역사상 중대한 전환점이 된 것은 사실이다. 진덕여왕 때부터 이미 무열왕이 실권을 가지고 추진했던 제도 개혁은 즉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대신들을 [[감찰]]하는 기관인 사정부(司正府)를 설치해 통치가 한층 정교해졌고, 율령 체제도 좀 더 업그레이드했다.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한 이후인 654년에는 이방부령 양수 등에게 명하여 율령을 상세히 살펴 이방부의 법제 60여 조를 정비했다. 신라에서 율령은 [[법흥왕]] 때 처음 반포했으나 이를 정비한 것이며, 율령 개정은 이후 [[문무왕]]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신라의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에 도움이 되었으며 신라에서 가장 왕권이 강대했던 시기라 평가되는 중대 왕권의 기본적 골격과 체제가 김춘추에 의해 다져지게 되었다. 흔히 [[진평왕]] 때부터 열세였던 [[신라]]가 태종 무열왕이 즉위하자 다시 상승세를 타고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알려져 있기도 한데 사실 태종 무열왕의 치세 전반부까지는 여전히 '''고구려와 백제, 말갈이 신라를 계속 침공해 여전히 엄청난 위기'''였다. 태종 무열왕 재위 2년(655년)에는 [[고구려]], [[백제]], [[말갈]]이 연합해서 신라 33개 성을 빼앗아 나누어 가졌고, 재위 5년째인 659년에도 하슬라([[강릉시]]) 방어선이 말갈과 고구려의 위협을 받아서 남쪽의 실직([[삼척시]])을 2선 방어 기지로 삼아야 했다. 태종 무열왕도 세 나라의 연합군을 처단하기 위해 655년부터 당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으나 아직까지는 연락이 없었다. 일단 당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백제보단 고구려 정복이었는데 신라 측은 고구려와 같은 편이자 고구려의 후방에 위치한 백제가 걸림돌이 되므로 고구려보다 먼저 멸망시켜야 한다는 것을 어필하고 있었고 실제로 백제 [[의자왕]]은 650년대 들어서 대놓고 반당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650년대 중후반 당시 당은 [[태종(당)|당태종]] 및 [[장손무기]]로 대표되는 [[관롱집단]] 출신 개국공신 세대가 저물고 [[측천무후]]와 그녀를 돕는 신진 세력으로 세대 교체가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태종이 쭉 해왔듯 고구려 직공을 계속하는 것과 일단 백제부터 공격한 후 고구려 공략 둘 중 뭐가 먼저일지 아직 정하지 못하고 원정군 파견 결정을 미뤄두고 있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이 무렵의 태종 무열왕이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冬十月 王坐朝 以請兵於唐不報 憂形於色 > 겨울 10월에 왕이 조정에 앉아 있는데, 당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었으므로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6년 기사}}} 그러나 659년 10월, 태종 무열왕의 [[꿈]]에 앞서 죽은 신하인 장춘과 파랑이 나타나 "당에서 내년에 백제를 친다고 합니다."라는 보고를 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태종 무열왕은 두 사람을 추모하는 불교 의식을 거행했고 그 자손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으며 한산주에 장의사(莊義寺)라는 절을 세워 이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물론 실제로 귀신이 나타나 정보를 알렸을 리는 없고 그만큼 양국의 이해 관계가 극적으로 맞아 떨어졌음을 이후 일화로 각색한 기록이다. 이듬해 660년 결국 당은 서역 정벌의 명장인 [[소정방]]에게 130,000명의 대군을 맡겨 [[황해]]를 건너 신라로 보냈고, [[나당연합군]]이 결성되어 660년에 백제를 단기간에 멸망시켰다. [[대장군]]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주력 군대가 [[황산벌 전투]]를 거쳐 [[사비성]], [[웅진성]] 공성전에서 싸우는 동안 무열왕은 6월 29일부터 후방 금돌성(今突城, 지금의 [[상주시]])에서 머물렀고 의자왕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660년 7월 29일 사비성으로 이동했다. 8월 2일에 열린 정식 항복식에서 [[의자왕]]이 직접 따르는 술잔을 받고, 과거 대야성 함락 때 백제군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백제에 투항한 배신자 [[검일]]과 [[모척]]을 처단해 딸 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의 복수를 했다. 그러나 백제 수도권을 속전속결로 공격해 무너트렸지만 아직 백제의 각 지방에는 여전히 지방세력이 남아있었고, 백제 남쪽 각 지방에서 [[부여복신]], [[도침]] 등이 이끄는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무열왕은 이전에 전장에서 직접 지휘하기보다는 전장은 [[김유신]]에게 맡기고 주로 후방에서 원격 지휘했던 것과 달리 태자 김법민과 함께 [[친정]]해 10월 9일 이례성(尒禮城)을 쳐 곧 함락시키고, 이어서 백제의 20여개 성이 항복하였다. 10월 30일에 구도 사비(泗沘) 남쪽의 산마루에 있던 부흥군을 공격하여 1,500명의 목을 베었고, 11월 5일에는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해 7일에 이겨서 700명의 목을 베었다. 11월 22일 신라 도성으로 돌아와 백제 멸망전에서 신라군으로서 공을 세운 선복, 두질, 유사지, 설유 등과 신라에 투항해서 공을 세운 백제인 [[충상]], [[상영]], 자간 등에 대한 [[논공행상]]을 벌였다. 결국 그가 원하던 [[삼국통일]]의 완성은 보지 못하고 백제 잔여세력과 [[고구려]], [[당나라]]까지 정리할 역할은 아들 [[문무왕]]에게 물려준채 661년 6월에 죽었다. 딸의 복수를 마치고 오래지 않아 죽었으니 일종의 [[복수귀]] 같은 인생인 셈. 삼국을 통일한 왕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은 편인데 태종 무열왕은 어디까지나 즉위 전에 왜, 당, 고구려를 넘나든 [[외교]] 활동이나 즉위 후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군주]]이다. 백제 잔존 세력을 완전히 정리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당나라 [[군대]]를 격파해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수한 사람은 그의 '''아들 [[문무왕]]'''이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것이 아니라 삼국통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왕으로 보는 것이 맞다. [[묘호]]로 [[태종]]을 올렸는데 훗날 [[신문왕]] 때, [[태종(당)|당태종]] 이세민과 묘호가 같아서 당나라에서 이것을 문제삼아 묘호를 고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신라 측에서는 이를 완곡한 어조로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